중국 주나라 왕실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周禮)』에 의하면
주나라에서는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품계를 회화나무(괴: 槐)로 표시하였다고 한다.
「三槐」라는 명칭은 우리 지역과 관련된 삼정승을 상징하는 지명이다.
조선말 이 지역은 남양군(南陽郡) 압정면(鴨汀面), 장안면 (長安面)에 속하였으며 마을마다 서당이 있었던 곳으로 어느 지역 보다 교육 문화 수준이 높았던 곳이다.
조선 중기 문신·문인.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시호는 문충(文忠).
문장가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문장에 비범한 재질을 보였다. 1590년(선조 2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한편 중국어에 능통하여 어전통역관(御前通譯官)으로 명(明)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교섭에 정부를 대표하여 활동했다. 그 뒤 대제학을 거쳐 병조판서·예조판서·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글씨는 왕희지체로 단아하고 중후하며 품격이 있었다. 저서로 《월사집》이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유춘, 호는 양파(陽坡), 시호는 충익(忠翼).
1624년(인조 2년) 진사가 되고,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37년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선양[瀋陽(심양)]에 호종하기까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선양에서 돌아온 뒤 승정원동부 승지에 임명되고, 49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73년 병으로 사직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6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현종을 보필하였다. 병으로 조정에 나갈 수 없자 현종은 가마를 타고 들어오도록 하였다. 성품이 원만하여 정적(政敵)이 없었으며 당쟁의 거중조정(居中調停)과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양파유고 (陽坡遺稿)》,《양파연기(陽坡年紀)》가 있다.
본관 청풍(淸風). 자는 경일(景一). 호는 하계(霞溪) 시호는 익헌(翼獻).
1721년(경종 1년)에 진사가 되었고, 34년(영조 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였다. 3사(三司)의 벼슬을 두루 거쳐 48년(영조 24) 병조판서가 된 뒤, 이조·호조·판서를 거쳐 52년에 우의정, 54년 좌의정, 59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1744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도내 사태(沙汰)로 인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구휼할 것을 상소하여 허락받았다. 1749년에는 공조판서로 재임하며 탕평책에 찬성하기도 하였다. 묘소는 화성군 우정읍 조암리 수정마을에 있었으며 2020년대 초반에 이장하였다.